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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비 부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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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비 부찰씨는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으로, 가경제와 도광제 시대를 거쳐 생존했다. 부찰씨의 출생과 가문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며, 80세가 넘은 건륭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진귀인으로 봉해졌다. 건륭제 사후, 도광제는 그녀를 진비로 진봉하고 수강궁에서 거주하게 했다. 도광 2년 사망하여 청동릉 유릉비원침에 안장되었으며, 건륭제 후궁 중 마지막으로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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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비 부찰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부친주사 덕극정액
배우자건륭제
칭호진귀인 → 진비 → 황조진태비
출생일?
사망일도광 2년 12월 8일
매장지청동릉 유릉비원침

2. 생애

부찰씨는 가경 2년(1797년) 간택을 거쳐 건륭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진귀인이 되었다. 이때 건륭제는 87세로, 중국 역대 왕조에서 남편 황제와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비로 여겨진다.

가경 4년 1월 3일(1799년 2월 7일) 건륭제가 붕어하자 과부가 되었다. 가경 25년 8월 27일(1820년 10월 3일) 도광제 즉위 후, 도광제의 할아버지인 건륭제의 유일한 생존 부인으로서 진비로 존봉되었다. 이후 가경제의 미망인들과 함께 수강궁에 거주했다.

도광 2년(1822년)에 훙거하였고, 청동릉 유릉비원침에 매장되었다.

2. 1. 건륭제 후궁 시절

부찰씨는 건륭 53년(1788년)부터 건륭 61년(1796년)까지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건청궁 위원경궁황후 귀비 등 인수를 위해 내무부당 명세》에 따르면, 가경 원년(1796년) 건청궁에는 비 4명, 빈 2명, 귀인 2명, 귀인 이하 44명이 있었는데, 귀인 2명은 백귀인 백씨와 악귀인 서림각라씨로, 부찰씨에 대한 기록은 없다.[1]

진귀인은 가경 3년(1798년) 7월 9일 기록에 나타나는데, 아버지 덕극정액의 재직 기간과 경력을 통해 가경 3년에 부찰씨가 가경제 즉위 후 처음 치러진 외팔기 수녀선발에서 내정의 주위로 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팔순이 넘은 건륭제의 후궁으로 정해졌으며, 아버지 덕극정액은 공업부 후보 주임사였으나 부찰씨는 진귀인으로 봉해졌고, 그 해 2월에 이미 입궁했다. 가경 4년(1799년) 1월 23일, 진귀인을 포함한 건청궁의 주인들은 태상황제의 승하로 서6궁에서 나와야 했다.

2. 2. 건륭제 사후

가경 4년(1799년) 1월 3일 건륭제(태상황제)가 붕어하자, 부찰씨를 포함한 건청궁의 후궁들은 서6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1] 도광제가 즉위하면서, 황조(皇祖) 건륭제의 유일한 생존 후궁이었던 부찰씨는 진비(晉妃)로 존봉되었다. 진비는 가경제의 다른 후궁(신비 유가씨로 추정)과 함께 수강궁 구역에서 거주했으며, 수이소(壽二所)에서 살았다.

2. 3. 사망 및 매장

도광 2년(1822년) 12월 8일 사시()에 진태비 부찰씨가 훙거하였다.[1] 도광 3년(1823년) 4월 26일, 부찰씨는 청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으며, 건륭제의 후궁 중 마지막으로 유릉비원침에 안장되었다.[1] 진비의 봉분은 다섯 번째 줄 서쪽에서 동쪽으로 첫 번째에 있다.[1]

3. 평가

부찰씨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남편 황제와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비로 기록된다.[1] 건륭제가 87세였던 1797년에 간택을 거쳐 입궁하여 진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1799년 건륭제가 붕어한 뒤 과부가 되었으나, 가경제도광제에게 존중받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도광제1820년 즉위하면서 할아버지 건륭제의 유일한 생존 부인인 부찰씨를 진비로 존봉했고, 부찰씨는 가경제의 미망인들과 함께 수강궁에 거주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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